주왕산에서 보낸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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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풀피리™ 작성일2011-11-24 10:52 조회3,4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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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 가는 길에.. 가을의 끝자락에 단풍 곱게 물들다. 주왕산 대전사.. 시주를 하는 사람들.. 늦가을에 찾은 주왕산은 단풍은 떨어지고 없었지만.. 산새는 아름다웠다. 산행길에 귀여운 다람쥐를 보았다. ^^ 돌다리를 건너서... 시루봉 - 떡을 찌는 시루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책하기 좋은 탐방코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바위 계곡이 인상적이었다. 저마다 여행의 자취를 남기는 사람들.. ^^ 귀여운 남매가 폭포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제 3폭포.. 늦가을에 찾은 주왕산은 겨울산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풍이 곱게 물들었을 때 찾았더라면 더욱 아름다웠을텐데... 제 2폭포.. 주왕산엔 3개의 폭포가 있고 평탄한 등산로는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항상 주말이면 사람들이 넘친다고 한다. 하산하는 길에 다시 1폭포를 만나다. 제 1폭포.. 무엇에 쓰는 물건이고.. ㅋ 현재시각 PM 15:36 주왕산 급수대 주왕암으로 가는 길.. 주왕암.. 주왕굴 [周王窟] 주왕암 건물 뒤편 계곡에 있는 동굴이다. 협곡 사이 암벽에 자리한 자연동굴로 주왕이 마장군의 공격을 피하여 이곳에 은거했다가 마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 후주천왕(後周天王)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애절하게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주왕암 입구에서 왼쪽으로는 촛대봉이 높게 서있고 오른쪽으로 높은 절벽 사이에 있는 작은 협곡을 따라 30m 정도 들어가면 거대한 암벽과 맞닥뜨리게 된다. 약 50m 되는 절벽 하단에 가로 2m, 세로 5m 정도의 동굴이 주왕굴이다. 주왕의 최후의 전설이 서린 굴 옆에는 주왕이 세수했다는 폭포수가 수량이 세진 않지만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에 있다. 주왕암 [周王庵 ] 대전사 동쪽으로 올라가는 계곡에 있으며 안절이라는 별칭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에 속하는 대전사(大典寺)의 부속암자이다. 919년(태조 2)에 눌옹(訥翁)이 대전사와 함께 창건했다는 설과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다. 이곳에 은거하였던 주왕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름 지었다 한다. 아빠와 함께 찾은 주왕산.. 신묘년 동안거 백일기도 산사에 소국이 곱게 피었다. 대전사 [大典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672년(신라 문무왕 12) 의상(義湘)이 세웠다는 설과 919년(고려 태조 2)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절이 있는 산과 절의 이름은 주왕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주왕내기(周王內記)》에 따르면,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고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었다. 이에 당나라가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 장군 오형제를 보내 주왕의 무리를 죽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주왕이 숨었던 산을 주왕산이라 하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절 이름은 나옹화상 혜근(惠勤)이 붙였다고 한다. 또한 신라의 주원왕(周元王)이 수도했던 산이라서 주왕산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창건 이후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승군을 훈련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중기에 불에 탄 것을 다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부속 암자로는 백련암(白蓮庵)과 주왕암(周王庵)이 있다. 이 중 백련암은 주왕의 딸 이름에서 유래하며, 옛날에는 이 암자에 큰 종이 걸려 있어 아침 저녁으로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하나 지금은 걸려 있지 않다. 주왕암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주방사로 추정되며, 나한전과 가학루·산령각 등이 남아 있다. 주요 건물로는 보광전(普光殿)과 명부전·산령각·요사채 등이, 유물로는 보광전 앞 삼층석탑과 사적비·부도 등이 남아 있다. 이 중 보광전은 정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李如松)이 유정에게 보냈다는 친필 서신을 목판으로 음각한 것이 보관되어 있다. 보광전 앞의 석탑은 근처에 흩어져 있던 석탑재를 짜맞춘 것이다. 절 오른쪽 밭에는 우물을 메운 자리가 남아 있는데,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본래 이 절에서는 부처에게 올리는 물을 매일 냇가까지 가서 길어오곤 하였다. 이를 귀찮게 여긴 승려들이 조선 중기에 앞뜰에 우물을 파고 그 물을 길어서 청수(淸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곧 불이 나서 전각이 불에 타고 말았다. 뒷날 한 도사가 와서 불이 난 이유를 설명하기를, 이 절의 지세는 배가 바다에 떠서 다니는 부선형(浮船形)인데 우물을 판 것은 마치 배 바닥에 구멍을 낸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다시 우물을 메웠다 한다. 이밖에 노루가 우물에 빠져 죽은 뒤 메웠다는 설도 있고, 이 물을 마신 승려들의 힘이 넘쳐 난폭해지는 바람에 인근 주민들의 원성이 많아지자 메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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