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든 기적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길. 해발고도 2500미터에 피어나는 살구나무들 사이로 이어지는 계단식 수로. 고개를 들면 어디서나 눈 쌓인 설산. 꽃 핀 살구나무 아래 서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그 사이 더 짙어진 꽃 향내. 세상의 일 따위야 다 잊어버린 채 내내 머물고만 싶어지는 수로의 마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무대가 되었던 곳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Abbottabad)에서 중국 신장의 카슈가르(Kashugar)까지 뻗어나간 1200킬로미터의카라코람 하이웨이. 히말라야, 힌두쿠시, 카라코람의 거대한 산맥들을 가로지르며 만들어진 이 도로는 20년간 파키스탄측 810명, 중국측 82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공사였다. 그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따라 이슬라마바드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열다섯 시간 이상을 달리면훈자 계곡(Hunza Valley)과 만난다. 7790미터의라카포시(Rakaposhi) 산의 발치를 적시는 훈자 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이다. 훈자 계곡의 중심은 발팃(Baltit) 성채가 자리한카리마바드(Karimabad). 해발고도 2438미터의 고지에 봄이면 살구, 복숭아, 자두, 사과, 앵두나무가 다투듯 피운 꽃이 온 마을을 뒤덮고, 가을이면 빨갛게 익은 사과와 노랗게 물든 포플러 나무들 너머 흰 설산의 이마가 눈부신 곳이다. 한때 이 지역 사람들의 장수와 건강으로 인해 세계의 조명을 받기도 해서샹그릴라를 그린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수로길 따라 걷는 천상의 트레킹 코스
이곳의 랜드마크는 계곡의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인간이 만든 수로이다. 훈자의 생활은 이 수로에 기대어 있다. 과일나무들의 물 대기는 물론, 옥수수나 밀 같은 곡류의 생산, 땔감이나 목재용 나무들의 성장까지. 그 수로를 따라 이어지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을 맞을 수 있는 천상의 트레킹 코스다. 코스는 무궁무진하다. 딱히 길을 정하지 않고도 수로를 따라 아랫마을에서 웃마을로, 웃마을에서 옆마을로 걸어다닐 수 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일이 지겨워질 무렵이면 작은 배낭을 메고 조금 멀리 다녀올 수도 있다.
울타르 날라(하천)에서 시작되는 메인 수로를 따라 걷는 3-4시간 소요의 트레킹은 훈자를 둘러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주변으로 수없이 가지를 치는 작은 수로들을 피해 큰 수로만 따라 걷는 길이다. 길은 카리마바드 북쪽 끝 폴로 경기장에서 왼쪽으로 틀어 수로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수로 옆으로 만들어진 좁은 오솔길은 하이드라바드 날라까지 이어진다. 혹은 발팃 포트에서 시작해 퀸 빅토리아 모뉴먼트를 돌아 나오는 더 짧은 코스도 있다. 또, 카리마바드 아랫마을인 가니쉬 마을로 가는 짧은 수로길(2킬로), 시장과 버스 터미널이 있는 알리아바드로 가는 먼 길(9킬로)도 있다. 어느 길을 선택하더라도 수로 옆으로는 오솔길과 나지막이 엎드린 돌집들, 꽃 핀 살구나무들이 따라온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들
조금 더 높이 올라가고 싶다면 훈자에서 가장 높은 마을인 멜리쉬카르와 두이카르(Melishkar & Duikar 3000미터)로 가는 길을 택하자. 카리마바드의 중심 거리인 바자 거리를 지나 카페 드 훈자의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된다. 4월 말이 되면 살구꽃이 진 자리에 라일락과 복숭아꽃이 피어나고 미루나무 잎들이 싱그럽게 피어나 천지가 초록으로 눈부시게 변한다. 알디트(Aldit) 마을-이곳의 성채는 발팃 포트의 미니어처처럼 작고 귀엽다-을 지나면 본격적인 오르막에 접어든다. 주변으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른 계단식 밭들이다. 샤바드 마을을 거쳐 계속 올라가면 두이카르. 그곳에서 전방위로 펼쳐지는 훈자 계곡의 광대한 전경은 땀 흘리며 올라온 오르막의 고생을 보상해준다. 근처의 이글 네스트 호텔에서 맛있는 훈자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나면 내려오는 일만 남는다. 훈자의 수로길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빼어난 풍경 못지 않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친절함이다. 훈자 사람들의 친절과 환대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퍼져있다. 수로를 따라 걷다 보면 어린 동생을 업고 다니는 어린 누이나 수줍은 미소를 건네는 마을 여인들과 마주친다. 그들이 잡아 끄는 손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가 차를 마시거나 말린 살구 따위를 얻어먹다 나오다 보면 목적지까지 걷지도 못한 채 하루 해가 저무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러니 훈자를 방문할 때는 일정이 고무줄처럼 늘어질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지상의 샹그릴라로 믿어지는 곳들이 다 그렇듯 이곳 역시 들어가기도, 빠져 나오기도 어려운 곳이기에.
여행 코스 소개
훈자 계곡의 중심지인 카리마바드는 다양한 트레킹을 할 때 베이스캠프로 삼기에 좋은 곳이다. 편리한 교통과 숙박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주변 마을과 산을 트레킹하기 최적의 마을이다. 가니쉬(Ganish)마을과 나기르(Nagyr) 마을, 알리아바드(Aliabad)까지의 반나절 짜리 트레킹, 더 체력이 된다면 울타르 메도우(Ultar Meadow 왕복 7시간)나 호퍼(Hoper 왕복 9시간)까지의 트레킹도 가능하다. 또 버스를 타고 나가 파수와 굴밋 빙하에 다녀올 수도 있다.
찾아가는 길
이슬라마바드에서 길기트(Gilgit)까지 버스나 비행기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미니버스로 갈아타고 세 시간을 더 가야 카리마바드다. 도로사정에 따라 이슬라마바드에서 24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여행하기 좋은 때
가장 좋은 계절은 4월부터 9월이다. 3월부터 5월 초까지 훈자에 머물렀던 경험으로 봤을 때 봄이 시작되고 살구꽃이 피어나는 4월이 가장 좋았다. 아직 본격적인 여행 시즌이 시작되지 않아 덜 붐비지만 이미 봄빛이 완연해 느긋하게 봄을 맞기에 좋은 계절이다. 훈자의 5월 최고 기온 27도, 최저기온 14도. 10월의 최고기온 10도, 최저기온 -10도.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10월부터 4월까지는 종종 눈에 의해 막히는 경우가 많다.
여행 TIP
훈자계곡은 훈자 강의 북쪽에 위치해있다. 훈자의 메인 타운인 카리마바드는 빼어난 자연 환경 때문에 인기 있는 관광지다. 라카포시를 비롯한 많은 6-7000미터급 설산과 호수, 빙하에 둘러싸인 훈자를 즐기기 위해서는 기간을 넉넉하게 잡고 천천히 이곳저곳을 둘러봐야 한다. 가급적 한 곳에 오래 머물며 동네를 소요하는 방식으로 여행하자. 카리마바드의 하이데르인과 올드 훈자인은 모두 토속음식이 뷔페 스타일로 나오는 싸고 맛있는 저녁식사로 유명하다. 최근 파키스탄 북부 지역의 치안 상황이 좋지 않으므로 미리 확인하고 출발할 것.
길기트에서 훈자가는 길목에서 살구를 파는 처녀가 이방인을 마주치자 수줍게 웃고 있다. 카라코롬하이웨이, 신라 고승 혜초가 서역을 왕래했던 길이기도 하다.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중국 신장성 카슈카르 옛 실크로드 발자취를 따라가는...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로, 서른넷에 사표 쓰고 방 빼서 떠난 세계일주를 꼽는다. 지구의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사이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시리즈를 비롯해 [유럽의 걷고 싶은 길],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