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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무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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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행가 작성일2008-11-01 23:37 조회1,2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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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화(中)는 걷고, 최미선(右)은 쓰고, 신석교는 찍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셋 다 걸으며 찍으며 쓰고 있다. 몸을 낮추니 길이 열렸다. 길이 열리니 세상이 다가왔다.
힘든 일 만나면 주저앉는 사람이 있다. 어려울수록 힘을 내는 사람이 있다. 타고난 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고, 운명은 만드는 거라며 악착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 돈과 이름에 연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이 매겨놓은 값에 매달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밝게 사는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힘들수록 힘을 내고, 뜻을 실행하고, 운명을 믿지 않고, 포기할 줄 모른다. 삶을 긍정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따뜻하다. 여기 세 사람이 있다. 서로 다르고 또 서로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글=안충기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1. 바닷가 걸어서 이 땅 한 바퀴 황경화

2006년 3월 1일 아침 저(황경화·68)는 고성 통일전망대를 걸어 내려왔어요. 전날 내린 폭설로 세상이 하얬어요. 어디에도 봄빛은 없었지요. 보살펴 드려야 하는 아흔 넘은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걱정에 끝없이 마음이 흔들렸어요. 작정하고 떠난 길, 그만둘 수는 없었지요. 호미곶을 걷다가 주례 보러 이틀, 어버이날 목포에서 노모 뵈러 사흘 올라온 것 말고는 모두 길 위에 있었지요. 하루에 40㎞ 넘게, 거제도에서는 잠잘 데를 찾지 못해 밤중까지 56㎞를 걸었어요. 영감님이 바람나셨나, 며느리가 속썩이나, 속죄할 일이라도 있나…. 무거운 배낭을 멘 조그맣고 초라한 할머니를 보고 만나는 이들마다 궁금하게 여겼어요.

일찍 여는 식당이 없어 아침은 빵으로 때울 때가 많았어요. 여자라고, 혼자라고, 밥을 팔지 않는 곳도 있었고요. 그래도 세상은 각박하지 않아요. 울진을 지날 때였어요.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없는데 걸어도 걸어도 인적이 없어요. 그때 지나가던 트럭 기사가 검은 비닐봉지를 툭 던지며 주워 보라는 손짓을 하고 갔어요. 우유, 두유, 캔디 한 봉지, 비스킷, 흰 장갑 하나가 들어 있더군요. 어찌나 고맙던지 눈물이 핑 돌았어요.

김해를 지날 때는 터널 아니면 갈 길이 없었어요. 잡아먹을 듯이 내달리는 차들을 피해 허겁지겁 빠져나가니 저 앞에서 트럼펫 소리가 들려요. ‘해변의 길손(stranger on the shore)’이었어요. 이웃에게 피해 줄까 봐 주말이면 한적한 데로 나온다는 청년이었어요. 신청곡이 된다기에 ‘대니 보이’를 부탁했죠. 그 청년, 진달래꽃 눈부신 길을 따라 구불구불 내려오는데 바람결에 노래가 아스라해질 때까지 나를 위해 계속 연주해 줬어요.

고창의 구시포 해수욕장에서 바지락 칼국숫집에 들어가니 옆자리에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있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저씨가 간암 말기, 아주머니는 위암 말기래요. 환자 모임에서 만났다더군요. 죽기 전에 가고 싶은 곳 가 보고, 먹고 싶은 것 먹고 다닌대요. 계산을 하려는데 주인이 5만원을 내밀어요. 먼저 나간 그 아저씨가 힘내라며 맡겨놓고 갔대요. 힘을 줘야 하는데 도움을 받다니…. 그 돈,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어요. 그 뒤 그분과 여러 번 통화했는데 언제부턴가 전화를 받지 않아요. 이제는 없는 번호래요.

새만금방조제 33㎞를 걸어서 건넜어요. 공사장 출입 트럭 외엔 일반인이 갈 수 없는 길이거든요. 걷기 모임에서 알게 된 교수님이 제자인 공사단장에게 연락해 줘서 가능했어요. 단장님이 공사가 끝나면 1호로 걸으려 했는데 이제 2호 해야겠다며 웃더군요. 임진각에 서니 6월 18일이에요. 이른 봄에 떠나 여름이 돼 도착한 거지요. 108일 걸렸어요. 동쪽에서 서쪽까지 4000㎞, 1만 리 길이었어요. 국도상으로 그렇지, 바닷가 따라 걷고, 길 잘못 들어 헤매기도 하고, 다리로 뭍과 이어진 섬은 다 돌았으니 실제 거리는 그보다 훨씬 많아요.

사실 이게 처음은 아니었어요. 2004년, 예순넷 때네요, 해남 땅끝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800㎞를 23일 동안 걸었어요. 올봄에는 원주에서 열린 100㎞ 울트라 걷기대회에 나갔죠. 26시간 안에 들어오면 되는데 22시간 걸렸어요. 최고령 여성이었대요.

39년6개월 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명예퇴직을 했어요. 어느 날 내 삶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는데 막상 학교를 그만두니 갈 데가 없더라고요. 오전 4시20분에 일어나 집에서 가까운 부평 만월산을 두 바퀴씩 돌았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세 시간씩 3년을 다녔지요. 그러면서 산에 푹 빠졌어요. 폭우가 쏟아지는 팔당댐 인근의 예봉산·적갑산·운길산을 한꺼번에 주파하고, 다음 날 또 배낭 꾸려 밤새 차를 몰아 포항 가서 배 타고, 울릉도 성인봉에 오르기도 했어요. 그게 먼 길 걷는 데 보탬이 됐나 봐요. 한비야씨의 국토 종단기를 읽으며 부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그 길을 걸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러다 문득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은 갈망이 되고 갈망에 가슴이 들끓었어요. 혼자 간다면 걱정할 게 뻔한 남편에게는 친구들이랑 간다고 하고 나섰지요.

세례명 ‘안나’로 더 잘 알려진 황경화의 블로그(http://kr.blog.yahoo.com/ropa420kr)엔 하루 5000명 넘는 사람들이 북적인다. 며칠 전 누적방문자가 150만 명을 넘었다. 황씨는, 보잘 것 없는 할머니 수다인데 만물상처럼 잡다하게 차려놔 그런가 보다며 웃는다. ‘백수’가 아닌 ‘1인 CEO’라고 주장하는 신석교·최미선의 블로그(http://kr.blog.yahoo.com/rainstorm4953/)는 수준 높은 작품들과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로 꾸며졌다. 지금까지 210만 명 이상이 다녀갔다.
젊을 때 못 해본 것 나이 들어 다 해보고 싶었어요. 청바지 사 입고, 인수봉 암벽 타고, 인터넷 게임에 빠져보고, 월미도 바이킹 맨 뒷자리에 타보고…. 쉰 넘어 운전 필기시험을 쳤는데 98점으로 1등 해 박수 받았지요. 정비 문제는 뭔 말인지 몰라 연필 굴렸는데 세 문제 다 맞았어요. 하하하. 배우는 동안의 긴장감과 활력을 좋아해요.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라는 말도 있잖아요. 지금도 수첩에 하고 싶은 일 목록 적어 가지고 다녀요. 중요한 것은 줄치고, 하고 싶은 것은 새로 써넣어요.

이렇게 말하니 팔자 좋은 할머니라고 하겠지요? 아이고 내 젊은 날 고생 말도 마세요. 착하디 착한 남편은 하는 일마다 실패했어요. 양계장, 기름집, 과외 지도, 할부 책 군납, 조경 사업, 서점, 택시기사…. 해본 일이 하도 많아 손으로 꼽으면 매번 틀려요. 내 월급은 받는 날로 채권자들에게 넘어갔어요. 세 끼를 굶고 출근한 날이었는데 반장 아이 엄마가 장미꽃 바구니를 들고 왔어요. 이게 식빵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작은애 낳았을 때가 엄청 추운 1월이었는데 돈 마련하러 서울 간 남편은 소식이 없고, 불기 하나 없는 방에서 둘이 이불 돌돌 말고 살았지요. 그때 부모님이 오셔서 이 독한 것아, 연락도 않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꺼이꺼이 우셨어요. 어느 날은 학부모가 가져온 잔치 음식을, 선생님들과 나눠 먹어야 하는데, 고기라고는 구경도 못하는 애들 생각이 나 캐비닛에 넣어놨다가 집에 가져가니 맛이 변했더군요. 고기를 물에 헹궈 다시 볶아줬는데 애들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먹는 거 보니 가슴이 미어지데요. 애들이 구두 닦고, 빈 병 모으고, 폐지 판 돈 모아 마련한 자전거를 애들 눈앞에서 채권자가 가져가는 것도 봐야 했어요. 절대 빈곤이었지요. 하도 힘들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런 고통을 주냐고 하느님께 삿대질도 했어요. 그렇게 27년간을 빚에 허덕이다 늘그막에 겨우 일어났어요. 그 시절 나를 지탱한 건 오기와 자존심, 그리고 증오였지요. 증오도 살아가는 힘이 되더군요. 그런 세월 다 견뎠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어려운 일 생기면, 설마 죽기야 하겠어? 이만하기가 다행이야, 라고 생각해요. 국토 종단하며 많이 울었어요. 고해성사의 길이었다고 할까요. 내게 상처 줬던 사람들, 내가 상처 준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서를 빌었어요.

사람들이 뭘 믿고 그렇게 나돌아다니냐고 물어요. 물론 믿는 구석이 있죠.

2. 자전거 타고이 땅 한 바퀴 최미선

지난해 봄 불쑥 바닷가 따라 달리고 싶었어요. 후다닥 준비를 하고 4월 11일 아침에 저(최미선·46)는 서울 정릉의 아파트를 나섰지요. 그런데 제가 자전거 왕초보거든요. 짐이 무거워 핸들은 흔들거리지, 다리는 후들거리지, 미친 듯 경적을 울려대는 차들을 피해 북악터널을 빠져나가는데 오금이 저리더라고요. 돌아서긴 싫었어요. 살면서 ‘깡순이’란 말 많이 듣거든요. 그래도 너무 쉽게 생각했나 봐요. 새벽 서너 시는 돼야 잠자는 올빼미가 오전 6시면 길을 나서야 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죠. 변덕 심한 봄 날씨는 또 어떻고요. 안면도 입구에선 바람이 어찌나 세던지 자전거를 끌고 갈 수조차 없었어요. 내키지 않았지만 트럭을 불러 30㎞를 타고 갔어요. 나를 끊임없이 위협하던 화물차를 타고 가자니 묘한 생각이 들었어요. 기사 아저씨가 화물 운전 30년 만에 달랑 자전거만 싣고 가는 건 처음이라더군요. 자전거를 탈 때 트럭이 제일 무섭다고 했더니 그 아저씨도 운전하며 자전거가 젤로 무섭대요. 좋은 추억 만들라며 빵빵 울려주던 경적 소리가 그때만큼은 감미롭 더군요.

모텔에서 잘 때는 자전거를 꼭 방에 들여놨어요. 내놓고 싫은 기색을 보이는 주인들도 있었지만 어쩌겠어요. 그 애 없으면 의미가 없는 길인 걸요. 빗속을 달리기도 하고, 개떼에게 쫓겨 도망도 다니고, 감자밭을 콩밭이냐고 물었다가 망신도 당하고 별별 일이 다 있었죠. 삼겹살은 3인분부터 판다며 배짱부리는 식당에 들어가 기분 상하기도 했지만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어요. 공짜로 잠을 재워준 할머니, 자전거로 전국 일주하는 대학생, 혼자 국토 종주하는 여대생, 왕사탕 담뿍 쥐어주던 할아버지, 남해 절경에 반해 자전거로 여행한다는 캐나다인…. 정남진에서는 민박집 주인과 죽이 맞아 폭탄주 파티를 벌이고 다음 날 죽을 고생 했어요. 울산에서는 아끼던 운동화가 다 해져 여관에 놓고 오는데 기분이 묘하데요.

어디서 왔소, 이 말을 길에서 가장 많이 들었어요. 서울서 왔어요, 하면 동네마다 반응이 다 달라요. 에이, 거짓말(곰소항의 횟집 주인). 옴메, 징그러운 거(함평 기사식당 아저씨). 우짜까나~잉(보길도 민박집 할머니). 워메, 신문에 날 일이네(여수 모텔의 주인 아줌마). 옴마? 몸이 억수로 고되겠네예(충무에서 만난 아저씨). 아이고 무시레, 독한 사람(대변항 멸치 파는 할머니). 우짜노, 웬 고생들이여(죽변항 건어물 파는 아주머니)….

속초를 지나 미시령을 넘었어요. 양평을 지날 때 아버지의 산소에 들렀지요. 울적할 때 가끔 찾는 곳이에요. 미욱한 딸년 남은 여정 지켜 달라고 기도했어요. 집에 도착하니 6월 5일이에요. 동네의 작은 횟집에 들러 회 한 접시에 소주 들며 자축 쫑파티를 열었지요. 중간에 일이 있어 서울에 다녀간 날들을 빼고 45일을 달렸네요. 말끔했던 자전거는 여기 저기 까지고 긁혀 10년은 쓴 것처럼 보이더군요. 마스크는 뜯어지고 장갑은 너덜너덜해졌고요. 얼굴을 가리고 다녔더니 양쪽 귀만 까맣게 탄 거 있죠. 자전거 도사 됐겠다고 많이들 물어요. 그런데 저요, 달리다 얼굴이 가려워도 아직 긁질 못해요.

제가 역마살이 몇 개는 끼었나 봐요. 차에 관심이 많고 스피드를 즐겨요. 여성지 기자 할 때는 기사 마감을 하고 밤 11시 넘어 종종 강릉으로 내달렸어요. 시속 225㎞까지 밟아 봤어요. 경포대 앞 시커먼 바다를 보며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고 돌아오면 동틀 무렵이에요. 두어 시간 자고 출근했지요. 여행이 전문은 아니었고요. 정치·경제인 인터뷰 기사 주로 썼어요. 사건 관련 기사 쓰며 한동안 조폭들이랑 잘 지내기도 했지요. 오호호. 여행 기사도 매달 한 꼭지씩은 썼어요. 그러다 5년 전, 10년 다닌 직장에 사표를 냈어요. 한동안 놀며 다른 일을 해볼 참이었지요. 그런데 일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거예요. 신문·잡지·사보 등에 원고 쓰느라 일주일에 대엿새를 돌아다녔어요. 집이 여관이고, 여관이 집이었지요. 가끔 집에 들어가면 낯선 거 있죠. 틈틈이 해외도 다녔고요. 그러다 어느 틈에 여행작가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그런데 말이죠. 사실은 혼자 다닌 게 아니에요. 제 곁엔 내내 괜찮은 남자가 하나 있었거든요.

3. 사진기 들고 세상 속으로 신석교

2002년 6월 18일 밤, 저(신석교·44)는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빌딩 21층 꼭대기에 바깥으로 삐죽 나와 있는 난간에 서 있었어요. 월드컵 8강 진출 여부를 결정짓는 날이었지요. 광화문 일대는 붉은 악마 응원단으로 꽉 차 있었어요. 그때 저는 신문 사진기자였어요. 그 장면을 잡으려고 올라갔지요. 그런데 제가 고소공포증이 심해요. 아무런 안전장비도 없이 서 있으려니 식은땀이 나더군요. 하지만 공포에 앞서는 게 욕심인가 봐요. 마감시간이 아니었으면 경기 내내 셔터를 눌렀겠지요. 그해 1월 4일엔 히딩크 감독이 정몽준 축구협회장과 북한산에 올랐어요. 그런데 다리를 다쳤다던 히딩크의 걸음이 무척 빠른 거예요. 무거운 장비를 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데 입에서 단내가 나더라고요. 게다가 물을 챙기지 못해 죽을 고생 했어요. 내가 왜 사진기자가 됐나, 후회가 되더라니까요. 하하하. 사진을 늦게 배웠어요. 서른에 사진학과에 들어가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그러세요. 난 네가 꿈이 없는 줄 알았다.

사진기자 생활은 재미있었어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다 문득 나를 돌아봤어요. 이럭저럭 살기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 거창한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자, 잘 할 수 있는 거 하고 살자고 마음먹었지요. 밥 먹다가 부모님께 회사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냈어요. 걱정하실 줄 알았는데 두 분, 다 괜찮겠냐, 한 말씀만 하시더군요. 나를 낮춰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어요. 여태 몰랐던 우리 땅 구석구석을 열심히 찍었죠. 안나푸르나·프라하·스페인 같은 데를 다녀왔어요. 쿠바를 잊을 수 없어요. 영화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영화가 되는 곳이죠. 음악만 있으면 환경미화원도 경찰관도 관광객도, 길거리건 상점이건 어디서든 흔들흔들 춤을 추는 곳, 순박한 사람들이 편했어요.

수입이 들쭉날쭉하니 삶은 불안하죠. 물건을 사도 할부를 못 끊어요. 일 생기면 떠나야 하니 계획을 세워 여행을 하지 못해요. 더 벌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어요. 하지만 빈곤과 풍요의 경계선에 있을 때 정신이 가장 또렷해져요. 지금처럼, 돈이 똑 떨어진 것도 아니고 많지도 않고 그럴 때 일할 의욕이 나고 살맛이 나지요.

우습게도 여행이 일이 된 제가 사실은 길치예요. 몇 번 가본 길도 헷갈려요. 생각이 많아 그런가 봐요. 그렇지만 걱정 없어요. 제 곁에는 똑 부러지는 ‘내비게이션’이 있거든요.

4.‘4차원’ 가족

황경화·최미선·신석교 셋은 한 식구다. 최미선은 신석교와 한 이불을 덮고 자는데, 신석교의 어머니는 황경화다. 최미선의 여행길 내내 옆에 있던 사람은 신석교이고, 신석교의 여행길 내내 내비게이션이 돼준 사람은 최미선이다.

2003년 최미선은 직장 문을 나섰다. 뭘 하든 굶어 죽기야 하겠느냐는 근거 없는 낙관이 있었다. 같은 직장에 다니던 신석교가 함께 다니자고 했다. 프러포즈였다. 7월에 최미선이 사표를 내고 8월에 신석교가 사표를 냈다. 회사에서는 만류했지만 두 사람은 듣지 않았다. 둘은 9월에 결혼했다. 예물은 14K 커플링 반지 하나였다. 결혼식 날 신석교는, 이 세상에 물이 있는 한 매일 아침 아내에게 커피를 타주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오늘 아침에도 신석교는 아내를 위해 커피를 탔다. 둘이 자전거로 달린 길은 그보다 1년 전에 어머니 황경화가 걸었던 길이다. 속초까지 갔을 때 신석교는 아내에게 물었다. 집에 빨리 가고 싶지 않아? 최미선이 답했다. 집에 뭐가 있다고? 신석교는 최미선이 자기보다 고수라고 생각한다. 길 위에 서면 더욱 씩씩해지는 아내가 있어 무슨 일을 해도 겁나지 않는다. 저지르기 좋아하는 최미선은 꼼꼼하고 속 깊은 신석교가 있어 어딜 가도 든든하다.

황경화가 믿는 구석은 남편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내의 의견에 한번도 반대를 하지 않은 이다. 국토 종단을 할 때는 ‘여보 벚꽃 지기 전에 돌아와요’ 라는 문자를 보낼 만큼 고운 감성을 가지고 있다.

황경화·최미선·신석교는 2007년 가을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800㎞를 29일 동안 함께 걸었다. 걸으며 가까워지고 싸우며 친해졌다. 아들은 조용하던 어머니의 놀라운 변신을 이해하게 됐고, 어머니는 말없던 아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시어머니는 똑똑한 며느리를 보며 아들이 색시 하나 잘 얻었다고 생각했고, 그러기는 며느리도 마찬가지여서 최미선은 지금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내공이 또 만만찮다. 집에서 회사까지 왕복 26㎞를 5년 동안 걸어 다녔다. 66세 때인 6년 전 수출 상담 하러 뉴질랜드에 갔을 때의 일이다. 상담 진행이 잘 안 돼 기분을 바꿔볼 겸 스키퍼스 캐니언의 71m짜리 번지점프대에서 몸을 던졌다. 다음 날 점프 인증서를 본 상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단박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주더란다. 그 아내에 그 남편, 그 어머니에 그 며느리다. 대책 안 서는 이 ‘4차원 엽기 가족’, 길에서 서로를 알고 길에서 사랑을 얻었다. 걷다 보니 길이 열렸다. 나이·지위·돈·명예가 빠져나간 자리에 평화·안식·행복이 들어왔다. 최미선·신석교는 함께 8권의 책을 냈다. 황경화는 2권을 냈다. 황경화는 지금 해안 일주기를 준비하고 있고, 최미선·신석교는 스페인 갔다 온 얘기를 엮고 있다.

어머니는 그래도 자식들이 걱정인데 둘은 태평이다. 어느 날 전화해서 물었다. 야, 늬들 쌀 살 돈은 있냐. 며느리가 답했다. 밥 없으면 라면 먹으면 돼요.

긍정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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